986년의 사건들

986.10.17. [가족]

이아렌 2024. 10. 17. 23:05

내가 태어났을 때에 세리아네는 이미 황태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황위 계승권자 중 유일한 황실 직계였지만 몇 년을 2황자 신분으로 있었다.

나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날 때부터 봐왔던 환경이라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도 여전히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내겐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는, 가끔씩 이런 생각도 했었다.

‘내가 형이랑 누나의 안전을 망가뜨린 건 아닐까?’

물론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황태자, 이리 와서 가까이 봐도 되어요.”

기억에 있는 가장 오래된 날에도 어마마마와 형이 있었다. 어마마마의 말에 천천히 다가와 눈을 맞추는 형에게 난 웃으며 안겼었지.

내가 아니라 형이 황태자였을 때까지만 해도 형, 누나와 내가 친남매가 아니라는 걸 몰랐었다. 그 때 부르던 호칭이 사실을 아는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어마마마와 형은 많이 바쁠 텐데도 줄곧 나를 찾아와 주었다. 그러면 나는 활짝 웃으며 기쁘게 반겨주었고.

어마마마와 형이 불러주는, ‘시온’이라는 내 애칭이 좋았다.

그렇지만, 너무너무 좋았지만.

‘내가 너무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들긴 했었다. 그러나 언젠가 잠결에 들었던 어마마마의 목소리가 그런 걱정을 덜어 주었다.

“... 찮아. 내게는 이 아이를 보는 게 낙이거든.”

 

일곱 살 생일, 처음으로 아바마마께 선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상상도 못 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 선물이란 건…

“축하해, 시온.”

“... 형.”

내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었다.

형은 여느 때처럼 내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마냥 평소처럼 웃으며 받지 못했다.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진실 때문이었다.

‘형이,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러면…’

형이 직계 황족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정말 만약의 경우엔 이대로 궁을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용인들이 떠드는 걸 들었었다. 그래서 내게 황태자 자리를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리 기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황태자는 형인데. 형이 아닌 황태자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는데.

나는 형처럼 잘 해낼 자신도 없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늘 봐왔던 다정한 미소였지만, 늘 그랬듯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식에서 나는 형을 따라 얌전히 축복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물음에 전부 답하고, 내게 황태자의 관이 수여될 때.

내게 관을 씌워주는 건 아바마마가 아니라 형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겠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걸 느꼈다.

‘원래는 이게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식이 끝날 때까지 나는 침묵을 지켰다.

 

“잘했어, 시온.”

식이 끝나고,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내게 형이 다가오더니 몇마디 칭찬을 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형과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아까의 궁금증을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음료를 내왔습니다.”

“... 아.”

노크 소리에 대화는 끊겼다. 아바마마의 명이라며 음료가 든 잔 두 개를 들고 들어온 사용인은 우리 앞에 잔을 하나씩 둔 후 떠났다.

“......”

형이 내 잔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음, 이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인 것 같은데, 바꿀래?”

다정한 물음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형이 바꿔준 음료를 마시며 웃었다.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헤헤.’

물론 원래 나에게 왔던 음료도 싫어하진 않지만 말이다.

음료를 거의 다 비울 때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들어오셨다. 이제 귀족들에게 얼굴을 비춰야하지 않겠냐면서.

나는 어마마마께 안겨 대기실을 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기 전 찰나의 순간에 보았다.

표정을 굳힌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형을.

 

대기실을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폭탄을 받던 중, 나는 속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뒤.

“콜록.”

그 잔기침과 함께 나온 것은, 붉은 액체였다.

‘... 어?’

그 뒤로 갑자기 같은 붉은 액체가 입 밖으로 계속해서 흘렀다. 목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사람들의 소리를 뚫고 강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엔 황자를 체포하라!”

그 말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고, 치안대가 급하게 움직였다.

‘... 아니야.’

그러나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형이 아니다.

그렇지만…

‘... 내가 말해도, 사람들이 믿어줄까?’

우리가 친하다는 것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정말 날 믿어줄까. 그런 의문과 목의 통증에 말을 할지 말지 갈팡질팡하던 중.

“말도 안 돼……”

누나에게 안겨 있는 형을 보았다.

“...!!”

온 몸이 피로 얼룩진 형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그 음료…!’

내가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바꾼 음료, 마치 다 알고 있었던 듯 외치는 아바마마, 그리고 지금의 이 상황.

누군가 나를 독살하고, 형을 그 범인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형이 자기도 독을 먹었다 했을 때 그것마저 노린 거라고 주장하려고…’

일부러 형에게 준 잔에도, 독을 조금 풀어서, 모든 상황을 자신들이 컨트롤하려 했다면.

그게, 지금 이 상황이라면.

‘형…!’

그럼 지금 형은, 대체 얼마나 위험한 독을 마신 거지?

 

“처방드린 약만 드시면 아마 바로 완치되실 것입니다.”

황궁의가 나를 진찰하고 내린 진단이다. 그리고.

“......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건 형의 상태에 대한 진단이었다.

“...!!”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러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정말 전하가 범인이 맞아? 아니, 상대 조금 아프게 하려고 자기 목숨 버리는 사람이 어딨어!”

경악하는 목소리, 아바마마의 확신을 의심하는 목소리, 안타까워 하거나 불안해하는 목소리들이 한 데 뒤섞여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아바마마는 강경했다.

“감히 이런 연극을 벌여 나를 능멸하고 황태자를 죽이려 한 황자를 처형하겠다.”

“...?!”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들도 쉽게 선동당하지 않았다.

“하, 하지만 폐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게 보통 연극으로 벌어질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 재판! 차라리 재판이라도 열어주십시오! 그러면 확실해지겠지요!”

“......”

그 난장판 속에서 결국 재판을 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하염없이 흘렀다.

 

“형, 형은…?”

재판 당일.

나는 재판정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꾸리신 전문 인력들이 나를 대신해 섰다고 들었다. 나는 증인으로도 참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잠시간의 휴정 시간, 급하게 아무나 잡고 형의 상태를 물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하루가 지나서야, 내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깨어난 형을 난 지금까지도 만나지 못했다. 위험하다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내가 형에게 가는 걸 막아든 사람들이 아직 더 회복해야 한다며 나를 사파이어궁에 가두었다.

그리고 오늘에야 겨우 원래 있던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나는 급히 재판장으로 달려갔다. 그럼에도 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재판이 시작되고, 나는 휴게실에서 떨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더이상 기다리기 힘들어져서 나는 재판장으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들려온 윽박지르는 소리의 뜻을 이해하고 나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 전하!”

“황태자 전하, 안 됩니다!”

기사들의 방해를 꾸역꾸역 뚫고 안으로 들어가, 위협받고 있는 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태자, 전하…?”

“어, 어떻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귀에 거슬리게 맴돌았다. 나는 빠르고 급하게 외쳤다.

“아니야!”

“......”

“형이, 형이 그런 거 아니야, 형 괴롭히지 마…!”

“... 쯧.”

나는 고개를 들어 의자를 던질 것처럼 들고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 매서운 눈빛에 몸이 움츠러들 무렵.

“...!”

차가운 피부와 금속의 촉감이 느껴지며, 눈이 가려졌다.

“... 형…?”

형이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

“천천히, 눈을 감고 귀를 막아.”

“... 형.”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알겠지?”

“......”

나는 고인 눈물이 형의 손틈새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올려 귀를 막았다.

쿵—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무어라 외치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지만, 역시 무시했다.

누군가에게 안기는 듯한 느낌과, 문이 열린 듯 밖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모든 소리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천천히 눈을 뜨자, 잔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아마도, 형이 내게 숨기려 했던 광경.

형의 몸을 뒤덮은 얼음들이, 형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평생이 지나도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미안, 미안해, 시오넬. 미안해.”

한참 후에야 겨우 회복한 형이 내 어깨를 붙잡고 중얼거린 그 말까지.

 

황태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지도 벌써 1년.

여전히 정무는 형이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고, 나는 하루빨리 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형은 여전했다. 남들 앞에선 사근사근한 미소를 짓고 아무렇지 않은 척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갔지만, 사실 이젠 알고 있었다.

 

-우울증… 이라고.

-예, 폐하. 이미 상태가 매우 심각하신 상태입니다.

-......

-황후 폐하?

-... 알겠네. 수고했네.

 

언젠가, 황궁의와 어마마마께서 형의 상태에 대해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날, 나는 그제서야 형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에 대해 어렴폿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형을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으로, 일 년을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월, 형을 황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줄 기회가 다가왔다.

형이 이에메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보러 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아카데미에서 서신과 상자가 도착했고, 또 조금의 시간이 지나 3월, 형은 차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전하께서 만드신 거예요? 대단하셔요!”

어느 날, 취미로 만들던 작은 인형을 본 시녀가 해준 말이었다.

“응. …아바마마께서 좋아해주실까 해서.”

아바마마께도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난 그런 기대를 품었었다. 분명 기뻐할 거라는 시녀의 말에 용기를 내어 토파즈궁으로 향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차가웠다.

“저, 아바마마, 이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느냐? 방해하지 마라.”

“......”

나는 그 차가운 말에 움츠러들었고, 힘없이 인형을 든 손을 떨궜다. 아바마마께선 내 손에 들린 인형을 흘깃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하셨다.

“황자보다 한참이나 부족한 주제에 더 자신을 갈고닦지는 못할망정, 쓸데없는 짓에 시간이나 낭비하다니.”

“......”

“쯧, 저런 것도 황족이라고.”

한 마디 한 마디 서늘한 칼날처럼 내게 박히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무서웠다. 그날 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어마마마께서 찾아오셨다.

“... 시온.”

어마마마께선 내 눈가를 쓸더니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그 부드러운 손길에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어마마마, 제가 하고 싶은 걸 가끔 하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언제까지 학문을 갈고닦기만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러자 어마마마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그럴리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하고, 그러면서 해야 할 것도 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거란다. 지금처럼 지내도 괜찮아.”

나는 어마마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마마마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부담 가질 필요 없단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어.”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집중하는 사람들.

나는 지금, 아카데미 입학 시험장에 와 있었다.

형과 어마마마의 권유로 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었고, 입학을 위해 지금 이 곳에 있었다.

나는 내 앞의 종이를 보았다. 빼곡히 적힌 문제들의 답을 차근히 풀어나갔다.

그런 과정을 몇 번 반복한 후, 며칠의 시간이 지나, 다시금 황실에 아카데미의 서신이 도착했다.

[최종 석차: 2/500]

“...!”

형과 마찬가지로 차석으로 합격한 나는 달이 바뀌자 형과 함께 이에메스로 향했다.

그 곳에서 마침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고 말이다.

지금 당장은 그래서 평화롭다. 그러나 나 역시 어마마마와 형이 세운 계획의 일원으로서, 언젠가는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이 신분을 이용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형을, 어마마마를, 그리고 나를 고통에서 꺼내 줄 계획을 위해.

그 때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도록, 내가 해야 할 역할은 막중하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우리는 성공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