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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6.12.27./986.12.31. [마지막]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날.  거리는 아직도 성탄제의 분위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탄제의 온기를 뒤로하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건 라키엘도 마차가지였다.  “신년제 드레스에는 아무래도 은색 브로치가 낫지 않을까?”  “에이, 무슨 소리를. 우리 아가씨껜 페리도트 장신구가 더 어울린다고!”  앨럿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두 시녀를 바라봤다.  ‘열정적이네.’  흐뭇하게 웃던 앨럿은 둘의 싸움을 깔끔히 종결시켰다.  “둘 다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싸워.”  “하지만, 아가씨! 같은 종류의 액세서리를 두 개나 하는 건……”  “누가 둘을 한번에 한대? 하나는 신년제에, 하나는 언니 생일연회 때 쓰면 되잖니.”  “……!”  시녀들이 아차..

986년의 사건들 2024.12.31

986.11.21. [어느 황실의 이야기]

아이란의 황실에는 수많은 후궁이 있었다. 각 후궁들이 슬하에 자식 하나씩은 두고 있어 황자와 황녀를 다 합치면 열 명이나 되었다. 그 중 3황자인 나와 4황녀인 라율 누님은 단 둘뿐인 황후 소생이었다. 그러나 장녀이자 황태녀인 루나 누님은 황비 소생이었기 때문에 황실은 물론 사교계 전체가 다음 대 황제가 누가 될 지 갑론을박을 펼치곤 했다. 물론 다른 형제들에게도 황위 계승권이 없는 건 아니라서 황궁엔 늘 찬바람이 불었다. 아무리 개인적인 사이가 좋고 서로 친하더라도 황위 계승권에 한해서만큼은 우린 적이었으니까. 나는 늘 라율 누님과 지내기만 했다. 어마마마께서 그러길 강요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또래인 4황자 벤자민이 놀자며 찾아와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율 누님이 ..

986년의 사건들 2024.11.30

986.11.14. [그거 알아?]

“그거 알아? 엘프 중에 날개에 깃털이 있는 개체도 있다는 거.”  “뭐? 그럴 리가. 엘프 날개는 나비날개처럼 생긴 거 아니었어?”  “대부분은 그렇지. 근데 깃털 있는 날개를 가진 혈통이 있다는 것 같더라?”  “에이, 인수랑 헷갈린 거겠지.”  “진짜라니까! 엘프 친구가 말해줬단 말이야!”  “......”  나는 가만히 그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 진짠데.’  잘 안 알려져있는 건 알지만, 진실임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저 대화가 신기할 뿐이었다.  … 그야, 깃털날개를 가진 혈통의 엘프가 나니까. ***   부모님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사고로 목숨을 잃으셨고, 나는 홀로 떨어져 인간들의 마을에 남겨졌다.  나를 거둬 준 인간은 식당을 운영하는 화목하고 따뜻한 가족이었고, 나는..

986년의 사건들 2024.11.30

986.11.14. [재난 이후]

“...... 후우…”  라일락빛 은발의 소녀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 주위에서 제복을 입은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마물 습격 사태 이후로 벌써 한달하고도 보름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 당시 마물 토벌을 위해 출정했던 성기사단은 여전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카시오페아의 정화 덕에 마음 역시 치유되었다고는 하나 기억을 완전히 지우는 게 아닌 이상 당시의 감정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몇몇 기사들은 여전히 PTSD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황실과 신전은 그런 그들을 위해 상담 및 재활 치료를 지원했다. 최대한 빠르게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그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 관련된 모두가 발벗고 나섰다.  이는 피해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직접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

986년의 사건들 2024.11.14

986.11.09. [강인하고 바른, 사람]

공기가 차가워진 11월의 어느 날.  세리아네는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  기사들의 수는 줄었고, 피해 지역의 복구도 아직 진행 중이지만 많은 사람이 일상을 회복할 정도까지는 도달했다.  이렇게나 빨리 세리아네가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에는 황후인 렐리지에의 덕이 컸다. 손을 놓은 황제와 태후를 대신해 렐리지에가 이재민 지원 정책을 펼친 것이다.  거기에 이엘 황녀가 서류 처리로 바쁜 황후 대신 발로 뛰며 백성들의 상황을 살펴준 덕에 황실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도 소강상태로 접어든 참이었다.  렐리지에는 수정궁의 예산을 사용해 희생자들을 위한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에 그만큼 많은 관이 제작되었고, 비교적 시신이 온전한 이들에게는 황후 전담 디자이너가 제작한 수의가 입혀졌다. 황후의 수행원..

986년의 사건들 2024.11.09

잔인한 해피엔딩 - 먼 옛날의 이야기

평화로운 세계수 밑 궁전, 이아렌은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그래도 괜찮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덕이었다. 형제들과 친구들도 여기 있었고, 광활한 궁전의 주인은 그런 그들을 성심껏 챙겨 주었다.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에 이아렌은 물론 그녀와 함께 온 모두가 전에 없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그러고 있는 순간에, 바깥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이유는 간단했다. 로엔의 탈출로 제사가 망가진 뒤 제사장이 길길이 날뛰며 자식들을 찾아다녔기 때문이었다.로엔의 역할은 대신할 사람을 찾으면 되고, 진상을 아는 사람들은 그저 제사장 본인의 업보이겠거니 했으나 그는 이 일을 두고 볼 수 없었다.제사장에게 로엔은 자기 권력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이대로는 안 돼. ..

986년의 사건들 2024.11.04

비극 속 등장인물 - 먼 옛날의 이야기

먼 옛날, 0년보다도 더 이전의 어느 때. 지금의 이에메스는 다른 이름의 왕국이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문명이란 개념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인간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그곳에도 여러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덕분에 맨 처음과는 다른 모습을 갖추게 된 그 왕국은 그들만의 문자를 만들었고,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지켰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를 올려 신을 추앙했다. 어느 세대의 제사에서는 아주 특별한 누군가가 신을 위한 기도를 올리곤 했다. 훗날 칼시아 최초의 마법사라 불리는, 누군가가. 어느 날의 제사. 그날도 변함없이, 그는 단상 위에 섰다. 반투명한 천과 보기 좋게 마른 몸이 그리는 선을 따라 빛이 반짝였다. 화사한 태양을 한가득 받는 그는 그 빛을 멀리까지 흩뿌렸다. 하나의 빛이 마법을 타고 색색의..

986년의 사건들 2024.10.26

986.10.17. [가족]

내가 태어났을 때에 세리아네는 이미 황태자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황위 계승권자 중 유일한 황실 직계였지만 몇 년을 2황자 신분으로 있었다.나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날 때부터 봐왔던 환경이라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렇지만 돌이켜보면 그 때도 여전히 사람들의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내겐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말이다.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는, 가끔씩 이런 생각도 했었다.‘내가 형이랑 누나의 안전을 망가뜨린 건 아닐까?’물론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황태자, 이리 와서 가까이 봐도 되어요.”기억에 있는 가장 오래된 날에도 어마마마와 형이 있었다. 어마마마의 말에 천천히 다가와 눈을 맞추는 형에게 난 웃으며 안겼었지.내가 아니라 형이..

986년의 사건들 2024.10.17

986.10.11. [기습 전쟁]

10월.어느새 날씨가 눈에 띄게 선선해지고, 여기저기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감성의 계절.그리고 세리아네에게는 황제의 탄신연회를 위한 성대한 준비가 한창인 시즌이었다.황궁은 연회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과 열병식 및 모의전을 준비하는 기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그리고 그 중에는 이아렌도 포함이 되어있었다.“후우…”“수고하셨어요, 이아렌 경!”“아, 감사합니다.”이아렌은 클로에가 내미는 물병을 받아들며 숨을 골랐다.‘쓸데 없이 거창하기는.’사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의전이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열병식까지 이렇게 자주 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열병식을 준비하는 매 순간 하고는 했다.그녀가 황제로서 군림했을 당시에는 이렇게 자주 군 행사를 가지..

986년의 사건들 2024.10.11

986.09.29. [뒤편의 이야기]

율리안과 시리카의 국경지대에 율리안 성기사단이 투입되기 며칠 전. 세계수 안의 한 별실에서는 여전히 마물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 됐습니다.” “...... 후우!” 카시오페아는 작업을 끝마친 로엔의 한 마디에 참았던 숨을 뱉었다. 루카 역시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조금 무리해서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마물을 공략하고 기록했다. 곧 시험기간인 사람이 있긴 하지만, 뭐 어떤가. 그가 뭘 해도 일단 과 수석은 따놓은 당상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 하나는 참 잘 고르셨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완성된 수호자라는 걸 카시오페아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는 늘 그렇듯 소소한 잡담이 이어졌다. 격렬한 싸움으..

986년의 사건들 2024.09.29